"너를 낳아 금이야 옥이야 키웠다"고 말하는 부모들을 많이
보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들의 심사를 의심한다. '낳아 키웠다'는
말 다음에 올 말은, '그러니 우리가 늙으면 너희들이 우리를 돌보아
야 한다'일 것이다. 이 무슨 염치없는 말인가. 불순하고 타산적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다고 여겨지는 어버이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하고 의심스러워진다. 미래에 있을 보답을 내다보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부모라니, 동물세계에서는 인간뿐이다. 동물은
자기 새끼에게 아무런 보답도 기대하지 않는다. 낳아서 기를 뿐이다.

자식의 인생에 편승하기 위하여 이러니저러니 잔소리를 하는 부모는
추악하다. 부모에게는 부모의 인생이 있어 마땅하다. 자식이 눈을
돌리면 제 수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인생이어서는 곤란하다.
자식과 인생을 함께한다는 뻔뻔스러운 생각은 구역질나는 타산
덩어리라 여기고 지금 당장 내동댕이쳐야만 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자식은 부모에게 밥 이상의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 이상을 기대하면 자기만의 인생을 스스로 포기하는 꼴이 된다.

지금, 젊은이들 앞에 가로놓여 있는 것은 다른 누구의 인생도
아니다. 다른 누구의 시간도 아니다. 다른 누구의 공간도 아니다.
한 젊은이가 아무리 엉뚱한 짓을 저질렀다고 해도, 아무도 그 짓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주변에 있는
몇몇 인간이 자신의 삶의 양식을 깡그리 부정했다 해서, 일일이
좌지우지될 필요도 없다. 하물며 저 자신을 부정할 필요는 더더욱
없는 것이다.

다시 한번 선생의 눈을 보라. 다시 한번 부모의 눈을 보라.
입으로는 거창한 말을 줄줄 내뱉으면서도, 그 표정이라니,
도대체 무언가. 왜 활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인가.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산다는 것이 그런 표정의 인간이 되는 것을
뜻하는가.

나는 절대로 농사 일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채소 한 포기도 기르지
않았다. 감히 농사를 모독할 수가 없었다. 소설을 쓰면서 지을 수
있는 농사는 단 한 가지도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만약 양자를
병행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거짓 삶을 사는 것이다. 어느 한쪽
은 장난 삼아 하는 소일거리일 것이다.

내게도 절대로 상종하고 싶지 않은 부류가 있다. 자신의 힘으로
처자식을 먹여 살리지 않는 남자와는 말도 하고 싶지 않다. 또 있다.
아무 목적 없이 인생을 사는 남자. 그 남자가 제아무리 좋은 성격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부모님 신세를 지거나, 구체적인 목적을 갖고
있는 남자와는 사귀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남자는 보기만 해도 화가
치민다.

그런 사람들은 나한테 오면 으레 "좋겠습니다, 예술가로 살 수
있다니"라고 말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무슨
말씀을, 먹고살기 위해 쓰는 것 뿐인데요." 그러면 그들은 노골적으
로 경멸스럽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는 "돈은 아무려면 어떻습니
까"라고 덧붙인다. 그러면 나는 또 이렇게 말한다. "당신처럼 부모님
덕에 먹고사는 사람은 모르실 테죠. 내게 가장 우선적인 것은 먹고
사는 일입니다."

우리들은 늘 이런 말을 주고받는다. "만에 하나 누가 실패를 하더라
도, 우리는 모른 척하자. 그놈이 다시 제 힘으로 재기할 때까지 묵묵
히 기다리기로 하자." 막상 일이 닥치면 친구가 도와줄 것이다,
그래서 친구가 좋다는 것이 아닌가라는 발상은 자동차 보험과
똑같은 발상이다. 그런 관계는 계산적인 관계다. 급한 일이 생기면
친구의 힘을 빌리면 된다는 안이한 태도가 오히려 실패의 원인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문제가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문제이며,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라는 자각과 신념이
없으면, 월급도 보너스도 퇴직금도 없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살아가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어느 쪽이 타당한 것인지는 나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나 자신을 거역하며 살고 싶었다. 자연 그대로 살고 싶다든가,
자신을 속이지 않고 살고 싶다는 희망은, 늙어 더이상 움직일 수
없는 할아버지가 되었을 때나 매달릴 법한 말이었다.

인생의 최대의 감동은 자신의 다른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요컨대 자신의 상상을 초월하는 새로운
자신을 만나는 일이다. 예전에는 결코 할 수 없다며 포기했던
일을 지금은 할 수 있다니, 이만한 감동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과거의 내가 그랬으니 미래의 나도 그럴 것이라는 발상으로는
그런 감동을 절대로 자기화할 수 없다. 나는 미지의 존재이며,
앞으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순간, 인생은
빛을 발하고 충만해지는 것이며, 또한 영원해지는 것이다.

모든 예술이 그렇지만 문학 또한 얼마만큼 개인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에 따라 성패가 결정난다. 불안이나 고독에서 슬픔과 분노가
태어난다. 그 벽을 돌파한 곳에 나 자신의 혼이 있다. 거기에
표현할 가치가 있는 그 무엇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니까 불안과
고독이야말로 창조하는 자들의 보물이다. 그 보물을 스스로
내동댕이 쳤다고 해서 글을 쓸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문학은
이미 장난이다.

from 마루야마 겐지, <소설가의 각오>

해밀 싸이에서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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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뾰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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